이른 아침 산마을 골목을 거닐다가 갓 구워진 빵 냄새와 여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문틈으로 고개를 넣어보니, 거기 빵집이 있었다.
이렇다 할 간판도 장식도 없는 외관. 으레 있을 법한 선반도 진열장도 없이 휑한 내부. 이곳이 빵집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무쇠 쟁반 위에 돌무더기처럼 수북하게 쌓여있는 팍시마디아였다.
보릿가루를 반죽해 두 번 구운 빵. 팍시마디아. 보따리에 배낭 주머니에 쿡 찔러 넣기 좋은, 목동의 빵이요 여행자의 빵이다. 그러라고 두 번 굽는다. 건조하게. 단단하라고. 잘 버티라고.
황무지를 넘는 목동의 보따리에 팍시마디가 들어있다. 언덕 너머 초원에 도착하면 동물은 풀을 뜯고 목동은 팍시마디를 뜯어 포도주를 적셔 먹는다.
빵과 이름이 같은 섬이 크레타 앞바다에 있다. 무인도 팍시마디아. 민물이 없어 동물이 살기 어렵다고 알려진 섬이다. 그 섬에 토끼가 산다고, 내게 이야기해 준 사람은 오랫동안 세상을 떠돈 여행자였다.
“팍시마디아에 토끼가 산대요” 몇 번인가 나는 크레타 사람들한테 팍시마디아의 토끼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 토끼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들 중 아무도 그 섬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들의 믿음은 확고했다. “그 섬엔 토끼가 없어”
그 섬에 정말로 토끼가 있을까?
“달에 토끼가 살아요” 몇 번인가 나는 이곳 사람들에게 달에 사는 토끼에 대해 얘기했는데, 그 토끼 또한 그들은 알지 못했다. 한국인은 다 아는 사실을, 이곳 사람들은 모르고 살아간다. 이곳 사람들이 아는 삶의 면면을 한국인들이 모르고 살아가듯이.
누군가는 토끼를 보고, 누군가는 코끼리를 본다. 산과 바다를 보는 사람, 그리운 이의 얼굴을 보는 사람, 소행성 충돌의 역사를 보는 사람…… 지구 사람들은 저마다의 달을 본다. 그러나 지구 어디에서도 달의 뒷면은 보이지 않는다.
반짝이는 눈동자들이 낯선 동양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다. 흔한 구경거리가 아닌 모양이다. 이 빵집의 유일한 진열대 – 가정집에서 볼 법한 작은 빵 보관함 – 에 갓 구워진 빵들이 온기를 품고 있다. “부가짜 하나 티로피타 하나 주세요” 라고 말했을 때 박수를 받을 뻔했다. 파도처럼 끄덕이는 눈빛들이 내 선택을 응원한다. 내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돈을 꺼내는 동안 누군가 빵봉투 안에 쿨루리를 선물로 넣었다는 걸 호텔방에 돌아와서 알았다.
* 부가짜: 겹겹의 필로 안에 커스터드를 넣은 파이
* 티로피타: 치즈 파이
* 쿨루리: 참깨를 뿌린 고리 모양의 빵
지금까지 내가 당신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진짜일까?
정말로 거기 빵집이 있을까?
여행은 이야기를 빚어내고, 이야기는 길이 된다.
위키피디아가 팍시마디아의 토끼를 모르듯이, 구글맵은 산마을 빵집을 모른다. 지도를 아무리 확대해 봐야 헛수고일 뿐. 우연히 그 앞을 지나더라도 갈 길 바쁜 사람, 배부른 사람,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다. 런던 킹스 크로스역 9¾ 플랫폼처럼.
그곳에 가려면, 지도가 아니라, 상상이 필요하다. 막다른 세상의 헐벗은 골목에서 벽을 바라본다. 아니, 너머를 바라본다. 갓 구워진 빵 냄새. 가장자리의 이야기. 세상의 뒷면이 거기 있다.
상상하는 순간, 마술이 시작된다. 믿든 안 믿든, 당신의 마음속에는 이미 팍시마디아의 토끼가 살고 있다.
2021년 12월 주용
그리스에 가고 싶어 가끔 들여다봅니다. 팍시마디아, 보릿가루로 반죽해 두 번 구운 빵! 목동과 여행자의 빵을 올리브에 적셔 먹고 싶습니다. 그 빵집을 찾아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부가짜와 티로피타도 사러 가야지요. 글이 맘에 와 닿았어요. 주용씨도 보고 싶군요.